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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올드 트레포드의 왕 에릭 칸토나

by 이카맨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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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이 유일하게 사랑한 프랑스인 칸토

그의 선수시절 이야기

식민지 대립을 통해 감정의 골이 깊었던 영국과 프랑스 이런 상황은 현대 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그중에 영국인이 사랑한 유일한 프랑스 선수가 있었다. 바로 올드 트레포드의 왕 에릭 칸토나이다.
1966년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축구에 특출난 실력을 보이던 그는 13살에 지역 유스팀 레카이롤에 입단해 골키퍼로 시작을 한다. 하지만 곧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옮겼고 200경기 이상 뛰었다. 그의 활약을 주목하게된 옥세르가 1981년 데려왔고 2년뒤인 83년 그의 17세 나이로 1군에 승격을 하게된다. 1군에 승격 후 칸토나는 특급 유망주 다운 활약상을 펼치지만 당시 주장이었던 브루노 마르티니에게 주먹을 날리는등 유소년기부터 유별난 성격을 보였다. 이외에도 다른 선수에게 깊은 태클로 3개월 출장정지 및 관중에게 공을 차 징계까지 받은 사고뭉치였다. 1988년 프랑스 21세 대표팀으로 뽑혀 유러피안챔피언쉽 우승에 일조 하지만 클럽에서는 문제아인 그를 더 이상 안고 갈 수 없었고 칸토나와의 계약은 연장되지 못했는데, FA로 나온 유망주를 프랑스 명문 마르세유에서 영입해간다. 마르세유는 그를 곧장 보르도로 임대를 보내고 임대를 간 기간에도 칸토나는 또 선수와 싸워 로랑 블랑과 카를로스 발데라마가 말린 일화는 유명하다. 이정도의 기행을 펼쳤지만 마르세유가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임대시절에도 프랑스컵 대회를 우승시킬정도 그의 재능이 뛰어났기 떄문이다. 국가대표 감독에게 욕설을 한뒤 1년 출전정지를 먹자 그때 마르세유는 더 이상 할수 없다 판단하고 그를 놓아준다. 그렇게 님 올림피크로 이적을 하고나서도 그의 기행은 끝나지 않았다. 심판 판정에 불만을 가진 그는 심판에게 공을 차버리고 이 사건으로 프랑스 협회는 그를 제명할 기세였고, 그는 축구가 힘들다며 은퇴를 생각했지만 프랑스의 전설적인 선수 미셸 플라티니가 그에게 잉글랜드행을 추천한다. 그렇게 잉글랜드 팀에 연락을 했지만 계속되는 거절끝에 리즈 유나이티드에 입단을 하게되었다. 그는 1991년 리즈에 합류에 돌풍을 불러왔다. 연일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리즈의 17년 만에 리그 우승을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감독과 싸우게 되어 팀은 그를 어떻게 처분을 할까 고민하였고 때마침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칸토나의 영입의사를 밝혔다. 

당시 맨유는 리그에서 25년동안 우승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퍼거슨의 고민이자 숙제였다. 칸토나는 맨유로 단 24억에 이적을 하게된다.
이는 역대급 가성비 이적이라 회자된다. 맨유에 갓 입단한 그의 나이는 26살 92/93시즌 칸토나는 입단 후 놀라운 활약을 펼쳐나간다. 직전 시즌 득점력 부족으로 팀이 허덕였지만 그의 합류후 팀이 180도 달라졌다. 브라이언 맥클레어,마크 휴즈등과 호흡을 맞추며 팀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프리미어리그 출범 최초의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칸토나는 '맨유의 왕'으로 칭송 받으며 그해 발롱도르 3위에 오른다, 당시 발롱도르 수상자는 이탈리아의 판타지스타 로베트로 바지오였다. 
다음 시즌엔 리그,컵 우승으로 더블을 기록하며 팀내 최다 득점자로 올랐다. 활약상이 너무 뛰어났기에 94년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상은 그의 차지였다. 특이하게 꾸준히 행해오던 그의 기행도 없었고, 이를 두고 사람들은 퍼거슨감독이 완벽히 통제를 하고있다고 했다. 이제 3연패를 노리던 맨유에게 1995년 1월 25일 사건이 터졌다.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하던 그에게 야유를 한 팰리스팬이 그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을 했고 그는 참지못해 관중에게 날라차기를 해 그 유명한 쿵푸킥사건이 터져버린것이다.

쿵푸킥 사건

선수가 관중에게 폭행을 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9개월 출장정지와 120시간 사회봉사를 하게된다. 그가 빠진 사이 팀의 중심을 잃은 맨유는 블랙번에게 리그우승을 빼앗기게 된다.칸토나가 다시 복귀하자 맨유는 귀신같이 리그와 컵우승을 되찾아오며, 퍼거슨감독은 그에게 주장자리를 주었다. 맨유 역사상 최초의 비영국인 주장이 탄생한것이다. 칸토나는 퍼기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긱스,네빌,베컴등과 함께 리그우승을 이끌었다. 
1997년 5월 11일 느닷없이 그는 은퇴를 발표한다.31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결심하였다. 최고의 위치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겠단 이유였다. 
은퇴식이나 기자회견도 따로 없었다고 한다 그저 구단에 홈페이지 짧막한 글 한줄이 다였다. 
그가 맨유에서 보여준 활약은 리그 우승 4회 FA컵 우승 2회등 185경기 82골 62어시스트로 매우 좋은 활약을 보였다.

플레이스타일

큰키와 둔해보이는 덩치만 보아서는 그가 타겟형 스트라이커라 생각하겠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의 훌륭한 테크니션이었고 그 스타일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맞추어져있었다. 요즘 선수와 비교하자면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고 볼수있다. 190에 가까운 신장과 매우 우수한 피지컬에 느리지않은 스피드로 당대 최고의 볼 컨트롤과 테크닉으로 전방에서 투입된 볼 키핑을 하며 동료들의 전방 침투 타이밍을 벌고, 적절한 패스와 마무리를 노리는 플레이메이커형 포워드다. 지금의 폴스 나인과 비슷하지만 그는 최전방에서 포스트 플레이도 잘하였고, 헤더골도 많이 기록하였다. 그러다 앤디 콜,솔샤르 같은 득점만을 노리는 선수들과 함께 할땐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롤을 맡아 도움을 위주로 플레이하던 만능형 공격수였다.

칸토나에 대한 이야기들

1.그는 프리미어리그 최초의 해트트릭을 달성한 선수이다.

2.골을 넣은 후 기뻐서 방방 뛰는 여타 선수와는 달리 칸토나의 골 세레모니는 그야말로 특별했다. 옷깃을 칼같이 잡아 세운 뒤 무표정한 얼굴로 관중들을 한번 슥 훓어보는데 칸토나의 그 작렬하는 카리스마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켜 '칸토나=옷깃'이라는 공식마저 성립되었다.

그의 세레모니

3.그가 뛸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징병제였기 때문에 프로 데뷔 후 1984년에 12개월간 군복무를 수행했다. 몰론 복무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김천 상무와 같은 군경팀에서 뛰면서 경기 감각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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